![]() 2025-06-1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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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있음] 마엘 엔딩 루트를 선택한 이유두 번의 결말을 보고 여자친구와 서로 다른 엔딩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왜 제가 마엘 엔딩을 선택했는지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검색해보니 마엘보다는 베르소 엔딩을 선택한 분들이 더 많더라고요. 어디선가 본 자료에서는 통계적으로 플레이하는 유저들의 60%가 베르소, 40%가 마엘 엔딩을 선택했다고 하더군요 ㅎㅎ 저는 두 번의 회차를 모두 마엘 루트로 진행했습니다. 초회차 플레이 후 유튜브를 통해 베르소의 엔딩이 조금 더 해피엔딩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제 마음은 마엘의 마음을 지지하게 되더군요. 이제 제가 그랬던 이유가 무엇인지 제 생각을 정리해 여기에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참고로 제가 마엘 루트를 선호하긴 하지만, 이 글이 베르소 루트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점 먼저 말씀드립니다. 베르소의 선택에도 분명 고통의 감내와 용기, 배려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며, 그 선택을 한 분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 브금 - 본문에 집중을 더해줄 BGM 재생하고 읽어주세요! 1-1. 베르소 또한 그려진 존재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캔버스 세계는 어린 시절 베르소가 혼을 담아 그린 그림이고, 성인 모습의 베르소는 엄마 알린(페인트리스)이 그려낸 그림 속 존재입니다. 초반에 등장하는 르누아르와 얼굴 없는 알리시아처럼, 이 베르소 또한 복제된 가족의 일부일 뿐이죠. 실제 베르소의 영혼은 모자를 쓴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게임 곳곳에 유령처럼 등장하며 맵을 떠돕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플레이한 어른 베르소는, 본질적으로 '찐 베르소'와는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보는 게 맞습니다. 그렇다면 복제된 그림에 불과한 어른 베르소가 캔버스 세계를 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은 정당할까요? 그의 자아가 실존했던 베르소에게서 기인했더라도 그 스스로 주체성을 가질 수는 없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본인과 동등한 가치의 수많은 뤼미에르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캔버스를 파괴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베르소가 "그림에 불과한 사람들의 소멸쯤은 괜찮다" 라고 여겼다면, 그 자신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그려진 존재이기에 그의 생각과 판단 역시 타인의 그것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이 괴롭다고 느꼈다면 뤼미에르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 또한 그와 같은 무게를 지녔다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0~33원정대까지의 세월을 거쳐 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던 뤼미에르 사람들에게, 고마주의 저주보다 더 크고 무거운 재앙처럼 받아들여 졌을것입니다. 1-2. 베르소의 괴로움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며 긴 세월을 살아온 베르소의 고통에는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자신이 누군가의 복제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자아의 괴리감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엘 엔딩 루트에서는 그려진 베르소만 소멸하고, 베르소 엔딩 루트에서는 베르소 자신과 어린 베르소의 영혼, 그리고 캔버스 속 모든 사람과 세계가 함께 소멸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려진 베르소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소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든지 스스로 원하던 결과가 예비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왜 베르소는 캔버스를 파괴해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캔버스에서 영원히 그림을 그려야 하는 '어린 베르소의 영혼'과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 해도 왜 베르소는 뤼미에르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살아가고 싶어했던 루네의 꿈을, 남편을 잃은 좌절을 딛고 일어서려 했던 시엘의 삶을, 함께한 동료들의 꿈과 희망을 외면해야만 했을까요? 함께 걸어온 동료들의 아픔과 꿈은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관점에만 매몰된 베르소의 선택. 이 부분은 쉽게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2-1. 마엘이 마주한 괴로운 현실 마엘은 화재로 한쪽 눈을 잃었고, 말을 하지 못하며, 얼굴에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지닌 채 살아갑니다. 게다가 오빠 베르소의 죽음을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며 살고 있죠. 이런 그녀에게 현실은 고통 그 자체였고, 캔버스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였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게 현실 도피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거짓된 세계라도, 그 안에서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삶' 으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마엘 엔딩의 에필로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게임사에서 직접 명시적으로 연출하긴 했습니다.) 2-2. 현실 도피 일지라도 한때 있었던 게임 셧다운제가 떠오르더군요. 게임을 못 하게 막아도 계정 공유나 우회 접속 등의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게임을 하고야 말죠. 결국 이러한 제도는 실질적 효과보다는 억제와 통제로 받아들여졌고 지금은 폐지된 상태죠. 같은 시선으로 볼 때, 저는 베르소, 르누아르, 클레아가 주장한 캔버스 파괴 역시 마엘을 보호한다기보다는 그녀의 세계를 강제로 끝내는 폭압적인 통제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캔버스가 파괴된다해도 마엘, 특히 알린의 강한 집착이라면, 페인터의 능력으로 모작이라도 그려낼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베르소의 영혼의 일부 조차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강제적으로 끄집어내기 보다는 마엘이 스스로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그림이 더 정의로운 방식이 아닐까요? 물론 그녀가 스스로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 극복할 수도 있어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회복이라는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배제되는 셈입니다. 스스로 정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다면 그저 옆에서 지켜보며 도와주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게임의 엔딩은 마엘의 과몰입을 그대로 두는 것과 캔버스를 파괴하는 것, 극단적인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강요하기에 지금 당장 현실은 도피 일지라도 마엘의 마음이 향하는 쪽, 더 나은 가능성을 품은 쪽의 결말을 택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2-3. 도피가 아닌 선택 원정대는 보통 33세, 즉 고마주 1년 전의 나이에 뽑히는데 마엘은 나이가 한참 어린데도 스스로 참여했습니다. 뤼미에르에 갇혀있는게 답답해서 혹은 구스타브와의 관계 때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만, 페인트리스를 저지해 고마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선택은 마엘이 진짜 현실의 기억을 되찾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마엘이 단순히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캔버스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캔버스의 세계 자체를 사랑했으며, 그 세계를 지키려는 주체적인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2막 직후, 베르소의 캔버스 앞에 선 알리시아(마엘)의 대사에서는 그 내면에 도피하려는 감정이 부차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암시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주된 동기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반된 감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지키려 했던 세계를,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갑자기 도피의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건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마엘이 캔버스를 지키려는 것은 단순히 현실 도피를 위한게 아닌, 그 세계 자체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선택이라는 생각입니다. 3. 오빠의 유일한 유작 캔버스 세계는 마엘이 사랑한 오빠, 베르소의 유일한 유작입니다.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흔적이자, 알린(엄마)과 마엘에게는 기억과 추모의 공간이기도 하죠. 물론, 유작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기억이나 애도하는 마음까지 함께 지워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상실을 견디는 데 큰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분들이라면 공감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그 사람의 온기와 존재감이 깊이 스며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마엘의 입장에 서서 캔버스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4. 또 한 번의 상실 엄마 알린과 알리시아(마엘)는 베르소를 잃음으로써 한 번 큰 상실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작, 그것을 넘어서 실제 영혼의 일부가 담겨있기까지 한 캔버스를 파괴하는 것은 알린과 마엘에게는 다시 한 번 베르소를 잃는 상실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베르소 엔딩 에필로그에서는 아픔에 매몰되지 않고 극복하고 있는 것 처럼 차분히 연출되지만 실제의 고통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는 않죠. 캔버스 파괴라는 두 번째 상실이 정말 모두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5. 진짜 현실이 맞을까? 캔버스 바깥의 세상, 즉 페인터와 작가가 사는 그 현실이 과연 완전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캔버스 안의 뤼미에르 사람들은 자신이 그려진 존재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캔버스 바깥의 사람들도 누군가에 의해 그려졌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들의 세계도 또 다른 상위 캔버스의 일부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게임 내에 그런 설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상상이 마엘 엔딩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뇌절입니다. 네..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상상이 아닐까요? 어쨌든 그게 진짜 세계냐 가짜 세계냐보다, 지금 이 삶이 진실하다고 느껴지는가 그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6. 결국 우리도 마엘이다. 우리는 진짜 레알 현실의 세계에서 33원정대를 플레이한 유저입니다. 그런데 캔버스 바깥의 마엘, 알린, 르누아르, 클레아도 사실은 그저 게임이라는 픽션 속에 존재하는 캐릭터들이죠. 우리가 진짜 레알 현실 세계를 자연스럽게 살아가듯이 33원정대의 캔버스 바깥 세계의 사람들 역시 픽션임에도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그런 메타적 관점에서 보면, 가짜 세계 속 캐릭터가 그 안의 또 다른 가짜를 부정하는 것은 어쩌면 자가당착일지도 모르죠. 마무리하며 마엘 엔딩 루트의 에필로그는 거짓된 행복처럼 연출되었고, 베르소 엔딩 루트의 에필로그에서는 가족들이 상실의 아픔을 딛고 나아가는 것으로 연출되었습니다. 두 선택 모두 분명한 연출 의도를 가지고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메시지에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는 게임이 보여준 결말과는 조금 다른, 제가 상상한 다른 가능성을 담았다는 점을 밝힙니다. 저와는 다른 시선으로 게임을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하신 분들의 생각 또한 존중합니다. 그만큼 이 작품은 한 가지 해석에 갇히지 않는, 모두가 각자의 마음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많은 게임을 해봤지만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는 손에 꼽을 만큼 감명 깊고 인상적인 게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스토리와 몰입감, 그리고 그 흐름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음악과 그래픽, 지루할 틈 없이 긴장되는 턴제 전투까지. 모든 요소가 하나의 감정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완성도 높은 종합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는 내내 등장인물에 저절로 몰입되어서 대사, 컷씬 하나도 스킵하지 않고 모두 다 읽고 보게되는 마성의 게임. 이런 좋은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보게 되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 게임은 정말 저에게 다양한 감정과 많은 영감을 느끼게 해 준 좋은 게임이었습니다. 아마 평생 기억하게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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